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것들, 예술적인 것들에 끌리면서도 논리나 사실적인 것에 집착하는 내가 있다. 내가 이렇게 모순적으로 보이는 취향? 사고방식을 지니는 이유는 아마도, 도저히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정체성을 설명하고 싶은 갈망에서 나온 것 같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 친구를 정말 친구로 생각하는지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정말 자신이 없다. 우주 공간에 퍼져있는 여러 크기의 물질들을 포착하여 겨우 어렴풋이 일반화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정체성의 실마리를 외부에서 찾는 것은 쉽고 편리하다. 또는 글의 형태를 빌어서 정체성을 뭉툭그려 전달하는 것도 편리한 일이다. 다만 둘다 정확하지 않을뿐이지.
외부에서 찾는일은, 인스턴스식으로 포장된 여러가지 정체성 제품들 중 두 세가지 정도를 집어드는 일이다. 큰 고민도 고통도 없다. 그 제품의 가치를 인정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인정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익숙하니까. 그러나 당연하게도 소비자의 정체성은 일반적인 제품의 정체성은 일치할 수 없기 때문에 일시적인 쾌감만을 줄 뿐, 다시금 우울함에 빠지게 만든다.
논리적인 형태로 정체성을 번역하는 것은 커다란 망을 자아의 우주에 넣었다가 빼는 것과 비슷하다. 타인에게 ‘나’를 전달하고 납득시킬순 있지만 슬프게도 아무리 노력한 들 정확히 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좋아한다는 말에 담긴 감정과 생각들을 듣는 사람이 정확히 전달 받을수 없듯이, 언어는 커다란 체와 같다)
예술적인 것들은 보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그들의 정체성에 기반 하여 의미를 전달 한다. 예술적인 사진과 스냅샷의 차이는 보는 사람의 상상력 개입유무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의미의 예술은 작가의 정체성이나 의도를 항상 정확히 전달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혹은 나는) 본질적으로 우울하다. 온전히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은 영원히 충족되지 못할 것 같다.
예술이 소통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할 거같다는 의심이 논리에 집착하게 만들고,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다시 예술적인 것에 끌리게 만드는 것 같다. 요 몇년 사이의 이 딜레마에 대한 결론은 사랑이다. 강한 애착을 느끼는 것. 우리는 서로를 영원히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감정의 힘을 빌리면, 많이,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랑은 소통의 수단 이라기 보다는, 목적이자 수단이자 동력이 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완전한 소통에 근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이기에 더욱 아름답다.
완전히 전달할 수 있는 매체가 없고, 완전함 이라는 건 애초에 허상이라면 그에 근접하려고 하는 노력들은 너무 힘겨운 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 버겁다. 그래서 한창 우울할 때는 매일 자살과 생존 둘 중 하나를 강제로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느낌이다. 때로는 완전한 소통을 믿는 사람들이 부럽다. 완전한 것을 믿는 기독교인들. 그러나 불교처럼 모든 것이 비어있으므로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느끼는 것은 나의 감정은 순간 순간 그 자체로 존재하고 완전하다고 믿는다. 나의 기억속에 그 감정들은 분명히 남아서 나를 괴롭히거나 혹은 즐겁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누군가의 감정들은 분명히 남아서 불빛이 된다. 세상에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하는 사람들이 있고 체제가 있다. 그런 것들을 없애야 한다는 당위성은 모두들 알지만, 실제로 행하는건 감정의 동력이다. 해탈의 마음으로,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있나? 어떻게 사람들을 진정으로 웃게할 수 있나? 영원한 마음의 안정은 너무나 이기적인 것 아닌가? 변화할 감정에 집착하는건 잘못된 게 아니고, 사람들의 감정을 신경쓰는게 잘못된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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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쯤 메모장에 박혀있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