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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2일 월요일

풍덩

나는 정말이지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이 서툴고 느리다.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 문장도 만들어 놓았다. 말 그대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만났을 때가 제일 즐거운 날이다. 그래서 난 눈이 높지만 금방 사랑에 빠지는 모양이다. 이렇게 사는건 흥미롭지만 우울하다.
5 tonight, tongiht: 7월 2019 나는 정말이지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이 서툴고 느리다.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 문장도 만들어 놓았다. 말 그대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만났을 때가 제일 즐거운 날이다. 그래서 난 눈이 높지만 금방 사랑에 빠지는 모양이다. 이렇...

기만에 불과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정말이지 모두들 다르고 독특하다. 그 두 글자가 들어가는 좁은 공간에는 사람들이 가지는 수 많은 양상을 담을 수도 없다. 잠시 한 사람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보아도 많은 면모를 보게 된다. 우리는 '관계' 라는 좁고 불안정한 다리 위 중간에서 서로를 겨우 마주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모습을 알게 되는건 모두가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다. 대부분은 타인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마 본인 스스로도 새로운 얼굴을 보게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소설이나 영화 속 여러 인물들이 흘러간다.

감상적인, 재치 있는, 화가 많은, 예민한, 관대한, 귀여운, 악동스러운, 소시민적인, 우울한, 맑은, 충동적인, 기괴한, 아름다운, 추진력이 강한, 우유부단한, 자기파괴적인, 것은 한 사람의 모습에 담겨져 있을 수도 혹은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을 말하는 것 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특징들은 합쳐졌다가 흩어지고 다시 흘러가기를 반복하며 한 사람의 삶을 이룬다. 사람이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내가 있다.
나는 이처럼 모든 것이 될 가능성이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난 어떤 한 특징을 혐오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사실 두렵고 어쩐지 불편하기까지하다. (그러나 정말로 무감각할때도 있다.) 왜냐고 하면은 그건 언젠가 나의 파편이였고, 다시 나의 모습이 될 것임이 분명해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은 언제 나를 찾아올지 모른다. 난 어떤 면에 있어서 요조가 되었다가 베르테르가 되었다가 히틀러가 되었다가, 다시 잔다르크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잠재적인 나를 혐오하게 될수도 있겠다. 이러한 태도는 태초의 '나' 이후의 얻게 되는 일시적인 조건들에 대한 사랑이나 혐오가 두려운 것 일수도 있다. 겉치레가 없는 것은 무엇이고, 본래의 나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라는건 무엇일까. 인간이라면 마음 속 깊이 바라고 있는 본능인 것일까. 아니면 어떤 심리적인 결핍인 것일까. 영혼 사이의 연결이나 교감이라는 것은 모두 기만에 불과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복잡한 생각 할 필요 없이 세상에게 친절한 사람이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건 대부분 짝사랑이기 때문에 세상에게 친절해지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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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혐오의 대상이다. 혐오의 주체는 악을 타자화한다. 
자연법, 윤리의 근본이 측은지심에 있었다면, 이러한 태도는 본질에서 벗어난 철저히 이성적인 사고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위에서  분노와 혐오의 감정이 동조한다. (혹은 이성이란 이러한 감정을 합리화하기위한 수단으로 작용할수도 있겠다) 이성적인 틀은 편리하지만, 경계의 인물들을 품지 못한다. 이는 아슬아슬한 윤리적 맹신이다. 누구나 악의 주체가 있으며, 혐오의 대상이 있다. 악에 대한 맥락적인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한 이해에는 감정적인 의지가 뒷받침되고 그것이 원동력이 된다. 

5 tonight, tongiht: 7월 2019 '사람'들은 정말이지 모두들 다르고 독특하다. 그 두 글자가 들어가는 좁은 공간에는 사람들이 가지는 수 많은 양상을 담을 수도 없다. 잠시 한 사람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보아도 많은 면모를 보게 된다. 우리는 '관계' 라는...

2019년 7월 2일 화요일

삶의 시

catherine hyland moon / studio art therapy

우리는 아주 개인적인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삶에 대한 시가 된다. 무수한 것들이 드러날듯 말듯 나름대로의 형태로 세상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언어가 되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손실되고 생략된다. 그래서 침묵은 수 많은 것들이 표현되는 시간이며, 자아가 세계와 깊은 방식으로 소통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꽤나 명료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은밀한 표식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영원히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시적인 표현을 보는 건 명확한 사실만을 알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타인과 함께 어두운 그곳에서 더듬더듬 길을 찾는 동반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며 그 사람을 온전히 경청하는 것이다. 이를 가능케하는 건 나라는 존재의 민감한 공감일 것이다.

이렇게 예술적인 관점으로 타인을 보는 것은 관찰자의 창작활동 즉 소설쓰기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관찰자의 자아와 대상의 자아 사이의 융합과 공존이며 무한한 진실의 찰나 가운데서 그 순간의 진실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에 대한 표현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많은 것들에 대한 진실이다. 그것은 객관과 차이가 있으며 대상이 은연히 드러내는 것과 관찰자가 지각하는 것 사이의 경계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또한 비언어적인 표현이 언어적 표현의 맥락이 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하게 되는 건, 이와 같은 관찰이 타인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적 태도만으로는 우리가 예술작품을 볼 때 가지는 미적인 거리감을 해소할 수 없는 것 같다.

이걸 쓰고 읽고 있으면 정성일 평론가가 들뢰즈를 인용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가 떠오른다. 물론 맥락과 뜻은 다른 것 같지만.. 문장이 문학적이라서 여기에 쓰이면 또 다르겠지. 그리고 레오까락스가 언급한 무성영화가 가지는 신의 손길도 언어를 배제했을 때 집중할 수 있는 배우들의 삶의 시가 아닐까.


5 tonight, tongiht: 7월 2019 catherine hyland moon / studio art therapy 우리는 아주 개인적인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삶에 대한 시가 된다. 무수한 것들이 드러날듯 말듯 나름대로의 형태로 세상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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