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적인, 재치 있는, 화가 많은, 예민한, 관대한, 귀여운, 악동스러운, 소시민적인, 우울한, 맑은, 충동적인, 기괴한, 아름다운, 추진력이 강한, 우유부단한, 자기파괴적인, 것은 한 사람의 모습에 담겨져 있을 수도 혹은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을 말하는 것 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특징들은 합쳐졌다가 흩어지고 다시 흘러가기를 반복하며 한 사람의 삶을 이룬다. 사람이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내가 있다.
나는 이처럼 모든 것이 될 가능성이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난 어떤 한 특징을 혐오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사실 두렵고 어쩐지 불편하기까지하다. (그러나 정말로 무감각할때도 있다.) 왜냐고 하면은 그건 언젠가 나의 파편이였고, 다시 나의 모습이 될 것임이 분명해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은 언제 나를 찾아올지 모른다. 난 어떤 면에 있어서 요조가 되었다가 베르테르가 되었다가 히틀러가 되었다가, 다시 잔다르크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잠재적인 나를 혐오하게 될수도 있겠다. 이러한 태도는 태초의 '나' 이후의 얻게 되는 일시적인 조건들에 대한 사랑이나 혐오가 두려운 것 일수도 있다. 겉치레가 없는 것은 무엇이고, 본래의 나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라는건 무엇일까. 인간이라면 마음 속 깊이 바라고 있는 본능인 것일까. 아니면 어떤 심리적인 결핍인 것일까. 영혼 사이의 연결이나 교감이라는 것은 모두 기만에 불과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복잡한 생각 할 필요 없이 세상에게 친절한 사람이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건 대부분 짝사랑이기 때문에 세상에게 친절해지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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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혐오의 대상이다. 혐오의 주체는 악을 타자화한다.
자연법, 윤리의 근본이 측은지심에 있었다면, 이러한 태도는 본질에서 벗어난 철저히 이성적인 사고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위에서 분노와 혐오의 감정이 동조한다. (혹은 이성이란 이러한 감정을 합리화하기위한 수단으로 작용할수도 있겠다) 이성적인 틀은 편리하지만, 경계의 인물들을 품지 못한다. 이는 아슬아슬한 윤리적 맹신이다. 누구나 악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악에 대한 맥락적인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한 이해에는 감정적인 의지가 뒷받침되고 그것이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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